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04 대한민국 (문단 편집) ==== 2권 ====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일명 '유럽대전'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한국 정부는 유럽 전역에 사실상 여행금지를 선포한다.[* 이 소설이 발간되었을 때는 [[여행금지]]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여행금지라고 나온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영국, 러시아와 밀약을 맺고 위구르의 이권을 두 나라와 갈라먹기 위해 위구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물론 최종적으로는 러시아와 영국도 몰아내고 위구르를 장악할 생각이었다.] '어르신' 역시 신시에서 군사 훈련을 받던 호불청(모택동)에게 황국의 지도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비밀리에 위구르에 파견, 한국과 함께 위구르 독립운동에 나서게 한다. 위구르 지역이 시끄러워지자 황제 원새개는 청해성장 장작림에게 신건육군 7만 명을 주어 위구르 독립운동을 진압하도록 한다. 호불청과 한국 요원들이 위구르 독립운동을 지원할 무렵 위구르의 전력은 구식 화기 또는 냉병기로 무장한 위구르 독립군 1만 명, 티베트에서 온 티베트군 1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한국은 이번 위구르 분쟁에서 무관해야 했기 때문에 대놓고 무기 지원을 할 수 없었는데, 치우조 요원 김예진은 한국군 중령으로 위장하여 장작림이 있는 신건군 기지를 방문, 충고하는 척 하며 장작림의 군대를 한 곳으로 모으고, 넉 달 동안 땅을 파서 신건군 기지 지하에 [[C4]] 폭약을 매설한다. 때가 되자 위구르군은 폭약을 터뜨려 신건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아내 장해영을 잃은 장작림은 황급히 도주하다가 호불청이 이끄는 기병대 300명에게 붙잡힌다. 신건군이 대패하면서 황국은 육군의 절반을 잃고, 위구르 독립군은 장작림이 관할하던 창해시까지 점령한다. 독립군들은 1914년 8월 23일 [[우루무치]]에서 위구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한국더러 [[위임통치]]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 한국이 응하여 몽골에 있는 보병사단 2개를 위구르로 이동시키면서 황국은 위구르를 공격하기는 커녕 남은 영토도 지키기 급급한 처지가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흑역사대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그런데 오재용 수상은 여기에 언제든지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명분을 얻기 위해 의왕 [[의친왕|이강]]도 참석하라고 제안했고, 의왕은 고민 끝에 사라예보로 가기로 결정했다. 오재용 수상은 의왕의 안전을 위해 경력과 실력 모두 검증된 엘리트 요원들을 의왕의 경호원으로 배치했다.그러는 사이 [[세르비아]]에서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비롯한 세르비아 강성 민족주의자들이 '[[검은 손]]'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흑역사대로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질 1914년 6월 28일. 당초 한국은 전쟁을 통해 이익을 볼 생각으로 국내 평화주의자들의 시위를 무시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록 뒤에서 불을 지폈으며, 흑역사대로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암살을 방관할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이자 평화단체 '만민회'의 회원 홍성호는 세르비아로 파견된 명진수와 만나 한국 정부의 속셈을 깨닫고 자신이 먼저 암살범들을 죽여 1차대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명진수는 어차피 대공 부부 암살은 전쟁의 트리거에 불과하며 그들이 죽지 않는다 해도 전쟁은 일어난다고 차갑게 반박한다. 결국 홍성호는 자신이 용써봤자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그저 가까이에서 사라예보 사건을 취재하는데 집중한다. 한편 구 오종흡7연대 소속이었던 북한 출신 정예요원들은 한국당 조창희 의원에게 거두어진 사람들이어서 비밀리에 조창희 의원과 내통하고 있었고, 의왕은 보호하되 대공 부부와 그들을 죽인 자를 죽이라는 비밀 지시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암살 당일, 예정과 달리 의왕이 행사에 참석했다는 걸 알게 된 홍성호는 의왕까지 죽으면 전쟁이 더 확대된다고 여겨 검은 손 단원들을 모두 죽이려 하고, 건물 옥상에서 대공 부부를 조준하던 명진수를 비롯한 치우조 요원들도 의왕의 등장에 당황한다. 홍성호는 하루 전 검은 손 단원들로부터 훔친 권총을 난사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경찰들은 일제히 대공 부부를 보호하기 위해 몰려든다. 당황한 검은 손 단원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들고 있던 폭탄을 상대적으로 경호가 허술한 의왕이 탄 차량에 던지고, 경호원 엄신철이 쏜 총알에 죽는다. 의왕을 향해 날아간 폭탄은 다른 경호원 이상현이 대신 희생하여 막는 데 성공한다.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프란체프는 대공 부부가 탄 차량을 향해 돌진하며 총을 쏘려 했지만 그 전에 홍성호가 먼저 총을 쏴 프란체프를 죽였다. 그 직후 홍성호 역시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쏜 총에 맞아 죽고, 치우조는 이렇게 된 이상 대공 부부를 저격해서 죽여버린다. 의왕은 무사했지만 암살 현장에 의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국민들은 격분하여 연일 항의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준비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에 이어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뒤이어 전쟁에 뛰어드면서 유럽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로 쳐들어가고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독일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했고 국내에서도 주전론이 거세지자 참전한다. 그러나 타넨베르크로 진군한 러시아 제1군 25만 명은 한국의 첩보를 듣고 반격에 착수한 독일군 3만 명에 의해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궤멸당한다. 한편 한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하며 다른 비유럽권 국가들도 참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에 따라 미국 역시 중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서 할양받은 [[쓰시마 섬|대마도]]에서 훈련받던 동남아시아의 독립군들을 다시 인도차이나 반도로 보내 영국령 동남아 식민지를 공격한다. 독일군은 전진에 전진을 거쳐 [[마른 강]] 유역까지 진군한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엘리 박사의 조언에 따라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한국은 연합국과 동맹국을 넘나들며 [[참호전]]이 일어나도록 유도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마요르카 섬에 한국군이 주둔하는 것을 허락받아 유럽대전을 관찰하고, 독일을 지원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영국 해군과 충돌하도록 한다. 한편 미국령 [[하와이]]에서는 여전히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KKK가 나타나 현지에 사는 한인 50여 가구를 학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